국립 민속 박물관 방문기 (2) - 만원데이트
'한국의 마을 풍경' 모습을 제연해 놓은 미니어쳐 입니다. 인간이 하나의 집단을 형성하고 농경과 어로를 바탕으로 한 생활이 이루어지면서 마을이라는 생활 공간을 형성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마을의 기본형태는 배산임수(背山臨水)로 특징 되듯이 산과 물이 한정된 생활영역으로의 면모를 강하게 드러냈습니다. 마을의 구성은 크게 집과 논밭, 배후지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사람들이 사는 살림집은 전면의 시야가 트이는 곳에 대개 위치하며, 앞쪽으로 논과 밭, 뒤쪽에 산과 구릉이 자리합니다. 마을의 생활은 마을 구성원에 의한 협동으로 유지되며 이런한 협동에는 계와 품앗이 등이 있으며, 이를 강화하기 위해서 입사식(入社式)이나 동리매,마을 추방과 같은 제재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리고 마을의 단결을 고취하고 풍요를 기원하는 한국적인 축제인 '마을제'가 이루어 졌다고 하네요.여기에 전시된 마을은 농촌과 어촌이 조화를 이루는 마을이며 양반가옥인 기와집과 서민가옥인 초가, 그리고 정자나무가 마을 어귀를 지키는 마을로, 들녘에 모내기로 바쁜 농촌과 고기잡이가 활발하게 이루어지는 어촌을 함께 보여주고 있습니다.
TV를 보면 사극 영화나 드라마에서 종종 비춰지는 장면과 비슷한 '양반가옥 사랑방' 모습입니다. 양반가옥 사랑방은 남자들의 일상 거처로 아버지와 아들이 생활합니다. 조선시대에는 내외법(內外法) 이라하여 남녀가 따로 생할하라는 법률에 의거 양반가에서는 남자들이 사랑채에 생활하였는데, 여자들이 생활하는 안채와 담또는 채로 구분되었다고 합니다. 대문 가까이에 대게 자리하며 사랑방과 사랑대청, 누마루로 구성해 놓아 이곳에서 남자들은 글을 읽고 손님을 접대하며 잠을 잤다고 하네요. 문방사우와 서방탁자등을 갖춰놓고 글공부에 매진하는 모습이 인상적이기는 하나 너무나 인문학에만 열정을 쏟은 나머지 국가적 실용성에 관련한 학문연구는 부족하여 약소국이 되는 발판이 마련된듯 보입니다.
위에 있는 사진은 문방구(文房具)라 하여 글을 쓰거나 책을 읽을 때 사용하는 학용품 입니다. 글방이나 서재에 갖추어 놓은 물건이라 하여 문방구(文房具)라 하였다고 합니다. 학문을 숭상하는 유교 사회에서 종이,붓,먹,벼루는 사대부들이 항상 곁에 두어야 할 네 벗 문방사우(文房四友)라 하여 중요하게 여겼다고 합니다. 특히 벼루나 연적의 문방구에는 과거 급제의 희망을 새기기도 했다고 하네요.
동그란 멋진 모양의 과학 용품은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혼천의' 입니다. 천제의 운행과 그 위치를 가르치기 위해 서전대전, 선기옥형 그림에 의거하여 만든 교육용 도구이며, 우측의 4각형 작은 도구는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해시계' 입니다. 해의 그림자를 이용해 시간을 표시한 휴대용 시계라고 하네요.
조그만 인형처럼 보이는 이것은 '명기'(부장품) 입니다. 명기는 무덤 안에 죽은 사람과 함께 넣어 매장하는 부장품을 말하며, 이것은 죽은 자를 위해 살아 있을 때와 마찬가지로 생활에 필요한 물품을 묻는 것으로, 신명(神明)의 기물(器物)이라 하여 '명기'라 하였다고 합니다. '국조오례의'에 명기는 생시(生時)와 같이 만들되, 나무나 흙으로 추악하고 작게 만들었다고 합니다. 품계에 따라 수와 재질도 다양하였다고 합니다. 그런데 왜 축악하고 작게 만들었을까요?
도깨비 방망이 처럼 생긴 이 물건은 '남태'라 하여 주로 흙덩이를 깨거나 뿌린 씨앗이 흙속에 묻어 바람에 날리지 않도록 하는데 쓴다고 합니다. 이 남태는 제주도 지방에서 마소(馬牛)가 끌던 것이라고 하네요. 실물을 보면 상당히 크다는 것을 알수 있답니다. 지금의 트렉터와 같은 역활을 한것 같습니다.
어릴적 시골 할머니집에 가면 이런 비슷한 모양의 '달구지'가 있었습니다. 이제는 박물관에서나 볼수 있다니 세월의 무상함을 여실히 느끼게 되네요. 말이나 소가 끄는 '수레'의 하나이며 본디 이름은 '달구지'이지만 소가 끌면 '우차' 말이 끌면 '마차'라고 부르며 소가 끌어도 '마차'라고 하기도 했답니다. 우리나라 달구지는 바퀴가 둘인 것과 넷인 것의 두 종류로 나눌수 있는데, 앞의 것은 북한지방에서, 그리고 뒤의 것은 이남 평야지대에서 많이 사용하였다고 합니다. 도외지에서 짐을 끌을땐 '말'을 곡식 따위를 운반할땐 '소'를 이용하였다고 하네요.
우리 조상들은 짐승을 잡기위해 다양한 '덫'을 사용하였는데 위의 사진에 나와 있는 것은 '두더지 덫'과 '족제비 덫' 입니다. 덫은 새나 짐승을 꾀어 잡을 때 사용하는 도구입니다. 덫의 종류는사냥감과 지역에 따라 여러 형태가 짐승의 발목이나 목을 옭아매는 '코'와 짐승이 치이도록 하여 포획하는 '틀'로 나눌수 있습니다. 덫의 종류로는 올무,창애,찰코,벼락틀 등이 있습니다.
너무나 화려하고 멋진 목조 작품은 '상여'입니다. 상여(喪輿)는 상례 때 시신을 묘지까지 운반하는 기구로, 규모에 따라 대여(大輿), 소여(小輿)라고도 합니다. 상여는 원래 소나 말,또는 사람이 끄는 '수레'였으나 '주자가례'를 수용하면서 사람이 어깨에 메는 것으로 바뀌었습니다. 상여의 형태는 가마와 비슷하나, 몸체 좌우에는 '멜채'가 있어서 형편에 따라 12인 또는 24인 까지 멜 수 있습니다. 상여는 대개 마을마다 마련하되 상여틀을 분해,조립할 수 있도록 만들며, 동네에 조금 떨어진 상여집에 보관하였다고 합니다. 사진에 있는 상여는 전주최씨 고령댁 상여로써 1856년에 경상남도 산청군 전주최씨 '최필주'(1796~1856)의 장례 때 제작된 상여 입니다. 4층 누각식 건물 형태로, 각 층마다 망자를 저승 세계로 인도하는 목각 인형과 12지신상이 배치되어 있습니다. 정말로 멋지고 화려한 작품입니다.
정초에 행하는 우리나라의 농경 세시는 농작물의 풍요와 마을의 평안,가족의 안녕을 빌고, 이를 통해 그해 풍흉과 운세를 미리 알아보는 종교적 행위로 이루어져 있습니다. 정월은 농한기이지만 새해가 시작되는 달이기도 하지요. 따라서 새로운 시간의 창조를 위한 '신성의례'와 건강하고 풍요로운 생활을 얻기 위한 '축원','점세의례'를 행하는 기간이였습니다. 이로인해 많은 행사들이 있었는데 달맞이,달집태우기,그림자점,좀생이점,지신밟기,동제,별신굿,안택,줄다리기,고싸움,차전놀이 등과 같은 제의를 통해 풍년을 기원하거나 풍흉을 점치기도 했다고 합니다. 이런 놀이들을 지방자치 단체의 축제나 운동회에서 형식적으로 볼수 있다는게 아쉽기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