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물탐방(探訪) ★

국립 고궁 박물관 방문기 (1) - 만원데이트

스파이크(spike) 2008. 1. 26. 01:04

지하철 3호선 '경복궁'역(驛) 5번 출구로 나가시면 '국립 고궁 박물관'이 보입니다. 얼마전 보수공사를 끝내고 다시금 개방 되어 예전보다 깔끔하고 쾌적한 느낌으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관람시간은 (평일)오전 9시~오후 6시까지 이며 (주말,공휴일)오전 9시~오후 7시까지 입니다. 입장료는 어른 2.000원 청소년 1.000원 입니다. '국립고궁박물관'은 500년 역사를 간직하고 있는 조선 왕실의 문화재를 소장,전시,교육하고 있으며 옛 선조들의 화려하면서도 기품 있는 왕실문화유산을 감상하면서 우리의 문화적 위상을 느낄수 있는 곳이라고 안내서에는 설명되어져 있습니다. 그럼 본격적으로 확인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출발!!! (^_^)/~ 

위의 사진들은 거북이 모양으로 만들어진 '금보'입니다. 금보(金寶)란 국왕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사대교린 문서나 왕명으로 이루어지는 국내의 문서에 쓰였으며, 왕위계승 때에는 왕의 정통성을 뜻하는 것으로 사용되기도 했습니다. 또한 왕의 행차 때에는 그 권위를 과시하기 위해 행렬 앞에 봉송(奉送)

하기도 했다고 하네요. 제왕의 인장은 옥으로 만든 옥새와 금으로 만든 금보(金寶 : 金印)로 나누어져 있었으나 대개 합쳐 옥새(玉璽)
라고 불렀다고 합니다. 좌측 상단에 있는 금보는 태조임금 금보(1683년 조선 숙종9),태조임금 금보(1872년 조선 고종9) 이며 태조의 조선건국 480년을 기념하여 존호를 추가로 올리면서 제작한 금보라고 합니다. 좌측하단 하얀 거북은 정조옥인 함(조선 1759년 영조35)이고 우측의 거북은 세종왕비 금고(조선 1446년 세종 28)와 세종임금 금보(조선 1450년 문종 즉위년)입니다.

조선 1776년 영조 52년이던 영조의 나이 83세에 왕세손이던 정조에게 내린 은인(銀印)입니다. 아버지 사도세자의 죽음과 관련한 <승정원일기>의 기사 삭제를 요청하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정조의 효심에 영조가 감동하여 만들었다고 합니다. 정조는 조회나 거둥 때면 늘 이 은인과 유세손서를 앞세웠다고 합니다. 도장의 인면에는 영조의 친필로 '효손팔십삼서'라고 새겨져 있습니다. <유세손서>에는 정조의 효성을 만세토록 전하길 바라는 마음과 후계자에 대한 믿음을 적었다고 하네요.(^_^)

좌측 상단은 조선 시대 관청에서 사용한 인장(印章)입니다. 오늘날의 공공기관에서 발행하는 문서에 해당 기관의 인장을 찍는 것과 같이 조선 시대에도 공문서에 해당 관청의 인장을 찍었다고 합니다. 기관의 인장은 발행된 문서가 진본이라는 것을 공식적으로 확인하는 증표로서 엄격하게 제작하고 관리하였다고 하네요. 글씨가 닳거나 새로 관청이 생기면 각 중앙관서나 지방관의 요청으로 공조의 상서원에서 제작하였으며 국가의 공식 인장으로서 크기와 제질 등의 규격이 정해져 있었다고 합니다. 문서와 관인의 위조를 막기위해 결재자들은 수결(서명)을 하고 인장을 찍었으며 문서 발송 대장에 공문을 접어대고 이음새에 감합(勘合)이라는 인장을 찍은 후 공문을 발송하여 후일 문서의 진위를 판별토록 하였습니다. 또한 문서와 인장을 위조한 사람은 참형에 처하고 처자식을 노비로 삼았다고 하네요. 좌측하단의 것은 완친왕을 추봉하는 금책과 문종 세자빈 금인 입니다. 

조선후기에 만들어진 '조선왕실족보'입니다. 고종 때 간행된 조선왕실의 종합족보로 전주이씨를 모두 조사하여 기록하였으며 '선원계보기략'에 뒤이어 작성되었다고 합니다. 붓 글씨를 어쩜 이렇게 멋지게 쓰는지 감탄스러울 뿐 입니다.  

경복궁 근정전 '임금 의자'를 1/3으로 축소한 모형 입니다. 궁궐의 정전과 편전의 중앙에 위치한 임금이 자리하는 곳에는 어좌(御座)나 용상(龍床) 등의 임금 의자를 놓고 왕이 앉아 신하들의 하례를 받고 조례를 행하였다고 합니다. 머리 위쪽은 보개(寶蓋)를 두어 포작으로 닫집을 짜고 낙양을 늘어뜨려 화려하게 꾸몄고 그 안 천장에 '용'이나 '봉황'을 조각해 넣었습니다. 어좌 뒤에는 '일월오악도' 병풍을 놓아 신성과 위엄을 갖추었으며 병풍 뒤로 돌아 계단으로 통해 나가게 되어 있습니다.

'관(關)자 인장'과  '친군영 인장' 입니다. 관자 인장은 조선시대 동격의 관청 사이나 상급 관청에서 하급 관청으로 보내는 문서에 찍은 도장이며, 친군영 인장은 19세기말 조선시대 임오군란 이후 신식무기로 편성된 군대의 인장이라고 합니다.

조선 시대에 만들어진 '마패'입니다. 조선 시대에 공사(公事)로 지방에 나가는 관원에게 역마(驛馬)를 징발할 수 있는 표로서 주던 패(牌)입니다.지름 10cm가량의 둥근 구리판으로 앞면에는 마필의 수효, 뒷면에는 자호(字號)와 날짜 따위를 새겼다고 합니다. 암행어사는 이를 인장으로 썼고, 어사가 출두할 때는 역졸이 이를 들고 '암해어사 출두'를 외쳤다고 합니다. 예전에 영화 '춘향전'이나 드라마 '암행어사'에서 많이 보았던 장면들이 생각 나는군요.(^_^)

'마패'와 비슷하게 생긴 이 물건들은 '야간 도성 출입 허가증'이라고 합니다. 조선 시대에 임금의 호위병들이 밤에 도성의 정문을 통과할 때 사용하던 출입 허가 증표라고 하는군요. 참으로 이쁘게 잘 만들어진 것 같습니다.   

조선 시대 '황제나 임금을 상징하는 패''고을 객사에 봉안했던 왕을 상징하는 패'라고 합니다. 왕을 상징하는 위패로 동지와 설, 국왕의 탄일 조하(朝賀)와 하례 의식 때 소령,관리,백성들이 이를 모시고 경배하였다고 합니다. 옛날에는 왕의 위엄이 대단했었나 봅니다. 이런 나무 판때기에 절을 할 정도이니.(-,.ㅜ)

'임금이 신하를 부를 때 쓰는 패'입니다. 조선시대에 임금이 신하를 부를 때 성명을 적어 내려보내 참열(參列) 의사를 타진하는 데 사용했던 패입니다. 일정도 바쁘고 업무도 많았을텐데 얼릉얼릉 호명해서 일을 신속하게 처리 할 생각은 않하고 이름 적고 전달하고 부르고 했으니 얼마나 시간 낭비가 심했는지 짐작이 갑니다. (이러니 나라를 일본에게 빼았겼지- ㅡ;)

제상에 올릴 술을 술잔에 따를 예를 행하기 위한 준소상(所床尊)의 모습입니다. 종묘 제례를 지낼 때에는 종묘 내실 신실 앞에 격식에 맞추어 제상을 차리고 그 앞쪽 건물 밖에 준소상을 차린다고 합니다. 준소상에는 제례에 필요한 술을 담아 두는 여러 가지 제기와 술잔의 하나인 작(爵) 등을 놓으며 긴 자루가 달린 용작으로 술을 밀어 작에 따른다고 합니다. 종묘 대제는 1년에  다섯번 행했는데 계절마다 준소상에 일부 다른 제기를 놓도록 정해져 있었다고 합니다. 자세한 사항은 좌측 메뉴중에 '국내여행-종묘 가는길'을 참고 하시길 바랍니다.(^_^) 

준소상(所床尊)에 쓰인 '술동이'들 입니다. 코끼리와 소(牛)의 모양을 한 술 통(桶)들이 매우 신기해 보였습니다. 술 통이라고는 전해 생각지 않았는데 놀랍습니다. 술을 부을 곳은 알겠는데 나오는 구멍이 어디인지 궁금하네요.   

'가례,빈례,군례,흉례'를 지내는 모습을 담은 그림입니다. '가례'는 왕실의 경사스러운 행사를 말하는 것이며 '빈례'는 외교와 관련되는 국가 의식을 말합니다. 또한 '군례'는 왕이 활쏘기나 무예행사,군대 사열에 참여하는 등의 의식을 가리키고 '흉례'는 상장에 관련된 의식과 산릉의 제사,시호와 책보를 올리는 의식을 말한다고 하네요. 왕도 상당히 바쁜 나날을 보냈을 것 같습니다. 밤에 후궁이랑 놀기도 정신 없었을 텐데.(^_^;)

좌측의 사진은 조선시대 임금의 음식을 마련하던 부엌 '수라간'의 현판 이랍니다.(오나라~♪~오나라~아주오나~♬) '수라간'하면 대표적으로 떠오르는 것은 역시 산소로 떡칠한 '영애'씨의 얼굴과 TV 드라마 '대장금'이였습니다. 임금의 음식을 마련하기 위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춥고 더운 날씨에 얼마나 고생들 했을지 현판만 보아도 짐작되고 남습니다. 우측 위의 현판은 '옥당 현판'입니다. 옥당(玉堂)은 학술 연구와 임금 교육인 경연을 전담한 홍문관의 별칭이라고 합니다. '김진규'의 글씨라고 하네요. (축구선수 김진규가 아니고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