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물탐방(探訪) ★

국립 중앙 박물관 방문기 (1) - 만원 데이트

스파이크(spike) 2007. 7. 7. 14:31

지하철 4호선 '이촌'역에서 내리셔서 2번 출구로 100M 정도 올라 오시다 보면 좌측으로 '국립중앙박물관' 입구가 보입니다. 입구로 들어오셔서 조금 걸어 가다 보면 '입장권'를 판매 하는 곳이 있는데요, 그곳에서 '입장권'를 구매 하신후(어른 2000원,청소년 1000원, 어린이 500원, 장애인 무료) 사진에 보이는 전시관 으로 입장 하시면 드넓은 홀이 펼쳐져 있습니다. ^^  

평일 오전이라 그런지 입장객들은 그리 많지 않아 '한산' 하였으며 31도가 넘는 아주 뜨거운 여름 날이 였음에도 실내는 냉방시설이 아주 잘 갖추어져 있어 굉장히 시원 했습니다. 더운날 사람 북적이는 '피서지' 보다 이런 박물관을 방문 하여 관람 하는것도 아주 좋을 듯 하네요. ^^  '홀'중앙은 '역사의 길'이라는 칭호가 붙어 있으며  앞으로 계속 걸어 가다 보면, '경천사 십층 석탑' 이 보입니다.

창문에서 하늘의 자연스러운 햇살을 받으며 자랑스레 우뚝(!!) 솟아 있는 건축 물은 '경천사 십층 석탑' 입니다. 이 탑은 고려 충목왕 4년(1348)에 대리석을 재료로 하여 새운 '십층석탑'입니다. 고려시대 목조 건축의 '다포'양식을 따르고 있으며,당시 불교 교리와 사상을 잘 표현 하고 있습니다. 기단부는 사면이 튀어나온 '아'(亞)자형으로 사자,서유기,나한 등의 조각이 있습니다. 난간과 탑신 그리고 지붕으로 이루어진 탑신부는 목조탑을 그대로 옮겨 놓은듯 보이네요. 1층부터 4층까지는 '영취산에서 설법하는 석가모니불'과 같이 불교에서 중요시 되는 여러 장면을 묘사한 16회상이 조각 되어 있으며, 지붕에는 각각이 어떤 장면인지를 알려주는 현판이 있답니다. 5층부터 10층까지는 '다섯 분' 혹은 '세분'의 부처를 빈틈없이 조각 하였고, 상륜부는 원래의 모습을 알 수 없어 '박공' 형태의 지붕만을 복원 하였다고 하네요. 이 탑은 1907년 일본의 궁내대신 (도둑놈)'다나카'가 일본으로 밀반출 하였으나,영국 언론인 'E.베텔'과 미국 언론인 'H.헐버트' 등의 노력에 의해 1918년에 반환 되었답니다.1960년에 이르러 경복궁에 복원 되었으나,산성비와 풍화작용에 의해 보존상의 어려움으로 2005년 새 박물관 개관에 맞춰 복원 하였다네요. 참으로 한국의 '미'(美)가 뿜어져 나오는 멋진 건축물이 아닐수 없습니다.

참으로 멋져 보이는 이책은 '훈민정은 해례본' 입니다. '세종대왕'이 '훈민정음'을 창제한 뒤 세종 26년(1446) 백성에게 반포한 책입니다. 세종이 지은 서문과 뒤이어 집현전 학자들의 '해석'(解釋)과 쓰임법인 '용래'(用例) '정인지'의 '해래'(解例) 서문으로 이루어져 있답니다. 이 책을 통해 한글을 만든 목적과 글자의 소리값,쓰임법,원리등을 알수 있으며 보통 '해례본'이라 부른 다고 하네요. 정말 한글은 세계에서 제일 과학적인 문자임엔 틀림 없습니다. 최고최고~!!!  

두루마리 휴지 처럼 펼쳐진 이 고대 문서는 국사 시험에도 무척이나 많이 나오는 '무구정광대다라니경' 입니다. 통일 신라 시대인 8세기에 '목판본'으로 만들어 졌으며 지금 전시되고 있는 것은 '복제품'이랍니다. 현존하는 세계 최고의 목판 인쇄본이며 1966년 10월 경주 불국사 삼층석탑(석가탑)을 보수할 때 발견되었다고 하네요. 한국 인쇄 문화의 높은 수준을 증명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 라고 합니다.

조선 철종 9년(1858)에 만들어진 '재주정리자' 입니다. 정리자는 정조 19년(1795) '정리의궤통편'을 찍기 위해 만든 활자를 일컫는 말이라 합니다. 글씨체는 청나라 때 만든 사전인 '강희자전'의 글씨체를 바탕으로 하였고 청종 8년에 '정리자'가 불타버리자, 두번째로 만든 것이라 하네요. 구한말 각종 인쇄문서에 많이 사용되었다고 합니다. 일일이 손으로 깍아 만들었을 텐데 정말이지 굉장한 노력에 감탄사만 나올 뿐 입니다.

위 문화재는 '황룡사 구층목탑 찰주본기' 입니다. 남북국시대(통일신라) 872년에 만들어진 것이지요. '황룡사'는 신라 진흥왕 14년(553)에 세운 신라의 국가적 사찰 입니다. '선덕여왕' 재위 시절인 632~646년에 '자장법사'의 건의에 따라 구층 목탑을 세웠 답니다. 이 탑은 부처의 힘으로 신라를 보호하고 삼국통일을 이루기 위해 세웠다고 하며 경문왕12년(872)에 기울어진 목탑을 바로 세우면서 초석 아래 '찰주본기'를 기록해 넣은 것 이라 합니다. 

위에 보이는 작품은 '인장'이라 하는 것인데 금속이나 돌, 나무에 무늬나 글자를 세긴 것으로, 문서에 찍어 신뢰성을 보증하는 데 사용 되었습니다. 곧 문서의 '위조'를 방지하기 위해 문서나 봉투에 찍었으며 인장을 찍는 절차는 매우 엄격했다고 하네요. 통일신라 시대 이후 부터 국내 행정에 활용되기 시작했다고 하며, 필자 개인 적 으로 기능적인 활용도 보다 '인장'에 새겨진 음각이나 손잡이 모양이 미술적으로 너무나 정교하고 멋지다고 생각 되어져 사진을 찍어 올려 보았습니다.  

고려 명종 15년(1185)에 만들어진 '을사명 청동 종'은 고려 후기 양식의 '종'이라 합니다. 고려의 장군 '조아무개'의 부인이 나라의 평안을 기원하며 만든 것이라 하는데, 그시절에 이렇게 '종'까지 만들어 기증할 정도라면 상당한 재력가의 아내 였을 거라는 생각이 드는 군요. 암튼 고려 시절의 '종'이나 '북'은 나라와 백성의 평안을 기원 하는 문구가 많았다고 합니다.  

예전에 '암행어사'라는 티비 드라마가 선풍적 인기를 끌던 때가 있었습니다. 부패한 '탐관오리'를 징벌 하기 위해 '마패'를 치켜들고 "암행어사 출두요~!!" 하던 장면에서 늘 통쾌함을 맛보곤 했지요. '마패'는 지방에 출장 다니는 관리에게 나라에서 발행해 준 일종의 신분증 이며 전국 각지에 설치된 '역'(驛)에서 마패에 그려진 말의 숫자만큼 말을 이용할 수 있었다고 합니다. 마패의 한쪽 면에는 일련번호,말의 숫자,제작연도,마패를 발급해 주는 '관청인 상서원'의 도장이 있었으며 다른 면에는 달리는 말의 모습이 새겨져 있습니다. 암행어사는 항상 마패를 지니고 다녔으므로, 마패는 암행어사의 상징이 되기도 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