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작소설(小說) ◈

<스카이뷰> 스파이크 19금 단편 소설(20)

스파이크(spike) 2016. 10. 23. 09:49


<스카이뷰>

 

아침 일찍 근무지인 병원 행정팀에 출근하여 책상에 앉아 오늘 하루 주어진 업무 중 어떤 것부터 할지를 차분히 생각한다. 그리곤 주변 동료들이나 상사가 눈치채지 않도록 긴 한 숨을 내쉬곤 일단 컴퓨터부터 켠다. 컴퓨터 바탕 화면엔 언제 다녀 왔는지도 기억이 가물가물 한 여행지 풍경이 덩그런 히 깔려있고, 그 멋진 전경 앞으론 자세히 보지 않으면 뭐가 뭔지도 알 수 없을 법한 수 많은 폴더들이 드글드글 매달려 있다. 푸른 바다 휴양지 산호 섬 한 켠으로 길게 늘어진 야자수에 꼭 폴더가 주렁주렁 열린 것처럼……

 

 

지옥 같은 전철을 타고 이미 출근 전에 진이 다 빠져 버릴 때로 빠져 버렸는데 일을 시작해야 한다는 것 자체가 불합리하단 생각이 들 틈도 없이 팀장님의 호출로 회의실에 집결한 나는 긴장된 표정으로 쌓여 있는 일만큼이나 다른 일을 더 받게 될까 걱정이 앞섰다. 그런 자신의 처지를 생각하니 공복의 위산 과다로 인한 가슴 통증에 게비스콘이라도 챙겨 먹어야 하는 건 아닌지 잠시 아찔한 생각이 들었다. 그렇게 시작한 티타임 겸 회의는 상관(上官) 몇의 쓸 때 없는 잡담으로 길게 늘어지기 시작했고 업무와 관계없는 그들의 말들에 시간에 쫓기는 나로썬 짜증이 슬슬 발동하기 시작했다. 그때 같은 부서의 팀장 하나가 병원일 과는 전혀 상관 없는 시댁식구 욕을 하기 시작했는데 자신의 남편이 너무 효자라 꼴도 보기 싫다는 게 주된 내용이었다. 특히 시어머니를 두고 백발마녀니 늙은 암고양이라며 비난을 퍼붓다 다시금 남편 욕으로 되 돌아가는 반복적 행태에, 미혼이며 홀어머님을 모시고 살고 있는 40대 중반의 나로썬 들어주기 힘든 내용들이 전부라 해도 과언은 아니었다.

 

“’저런 소리들 할 거면 왜들 결혼해서 애들은 그리 낳았는지……’”

 

이런 생각들을 하며 점점 식어가는 커피 한 잔을 거의 다 마셔갈 즈음 이번엔 또 다른 선배 하나가 끝나가는 티타임의 마지막은 없다는 듯 자신의 남편 얘기를 늘어 놓았다.

 

우리 남편은 IT회사에 다니잖아. 뭔 일이 그리 많은지 매일 11시에나 들어와요. 집에 도착하면 씻고 나랑 얼굴도 잘 안 마주치고 잠들기 바뻐. 또 술이라도 한 잔 하고 새벽 2시가 넘어서 집에 오는 날이면 씻지도 않고 자는데 정말 더러워 죽겠어. 술 냄새도 고약하고. 난 술도 못 마실뿐더러 코도 예민해서 참기 힘든데. 가끔 주말에 둘이 오붓한 시간이라도 보내려고 문 잠고 남편한테 달라붙어 콧소리라도 낼라치면 기겁을 해서 애들 방으로 뛰어 간다니깐. 그러면서 "얘들아 살려줘. 엄마가 날 공격 해라면서 크게 떠들고!!"


이 말을 듣자 티타임에 참석한 모든 이들이 킥킥대고 웃어댔지만 업무가 쌓여 피곤한 나로썬 그들 부부생활에 대한 이야기까지 귀로 듣고 소화 해 낼 만큼 여유가 있지 않았다. 그렇게 마지막 선배의 말로 티타임이 끝날 것이라 생각하고 일어서려는 순간 옆에 있던 후배 하나가 이번에 자신이 다녀온 여행에 관한 이야길 꺼내 놓기 시작했다. 그 때 정말 심기에 불이 붙어 열이 확 올랐는데, 그 이유는 상관(上官)이나 선배들까진 인내를 가지고 이야기를 들어 줄 수 밖에 없는 처지였지만 후배의 노닥거림 까지 듣기에는 시간이 촉박하고 할 일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모두들 그녀의 이야기에 주목하는 분위기여서 나는 엉덩이를 의자에서 살짝 땠다가 다시금 자세를 가다듬고 앉을 수 밖에 없었다.


그녀는 내 4년 후배로 결혼하기 전부터 상당한 미인으로 소문난 간호사이자 병동 주변의 수 많은 남자들이 추파를 던질 만큼 유명한 인물이었는데 병원 내에서는 근무에 방해 된다며 그 어떤 남자와도 만나지 않는다는 마인드를 내세우고 누구든 접근 하는 것을 불허하는 투철한 직업 여성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하지만 자신의 후배였고 일을 함께 해야 했던 그녀를 학창시절부터 몇 년간 보아왔던 나는 그 후배의 사생활이나 집안 사정을 나름 잘 알고 있어 그녀가 병원에서 하는 행동과 밖에서 움직이는 모습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란 것을 꽤 뚫고 있었다.


한마디로 병원은 더 커다란 작전을 위한 하나의 전략적 공간이란 생각이 들 정도였다고 말해도 과언은 아니었고, 아무튼 그녀는 이번에 시부모님, 애들 둘과 함께 일주일간 하와이로 해외여행을 가서 돈이 2천 만원이 넘게 깨졌다며 징징대기 시작했다. 특히 우리 남편도 워낙 효자라, 효자 남편 얻으면 마누라가 고생한다는 말을 늘어 놓으며 피해자 코스프레를 가장한 자기 자랑을 한껏 늘어 놓았다. 그런 후배의 얘기를 듣던 나는 한 쪽 귀로는 이야길 듣고 나머지 다른 귀로는 흘리며 예전에 그녀가 술이 취해 나에게 떠들었던 말을 떠올리기 시작했다.

 

언니. 저는 정말 괜찮은 남자랑 결혼 할 거여요. 학벌은 무조건 서울대가 우선이지만, 집안 괜찮고, 직장도 좋으면 스카이 중 하나도 괜찮아요. 하지만 1순위는 무조건 서울대. 그리고 얼굴도 잘 생기고 키도 크고 능력 있음 되는데 요즘 몇 년을 그런 남자 만나러 다녀도 조인성 같은 인물은 만나기 참 힘드네요.”

 

그렇게 고르고 골라 수 많은 남자를 갈아 치우길 반복하던 후배는 어느 날 내게 슬며시 다가와 청첩장 하나를 건네며 다음달에 결혼 한다는 말을 건냈다. 그리곤 결혼 전에 저녁 같이 하자는 그녀는 그 식사 자리에서 남편은 같은 병원에 다니는 전문의라고 말했고 자신이 원하는 조건에 대부분이 들어 맞아 너무 행복하다고 했다. 그런 과거를 잠깐 떠올리며 모두 마셔버린 종이컵 안에 커피 찌꺼기만 남은 몇 방울의 물기를 이리저리 흔들며 식은 잔 안을 멀거니 바라보던 나에게 후배의 징징거림은 다시금 들려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말이에요. 뭔 여행비가 그리 비싸요? 어쨌건 이번에 울 남편이 큰 돈 썼죠. 거기 대형 리조트였는데 그런 곳에서 이곳 저곳 둘러봐야 하잖아요. 하지만 우리 남편은 수영장에서 잠만 자는 거 있죠. 돈 아깝게…… 시부모님들이 그 나마 애들이랑 많이 놀아줘서 다행이긴 한데 비싸도 넘 비싸더라고요. 가뜩이나 요즘 애들 학원 때문에 이사해 힘든데.”

 

그 말을 듣고 있던 나는 더 이상 인내심을 발휘 할 수 없었고 간단하게 일 처리에 관련한 내용만 전달하고 끝내지 못 하는 상관들의 행태에 대해서도 화가 치밀었다. 그 때 후배가 또 다시 아유~우리 남편은 말이지요!”라는 말이 귓가에 울려 퍼지자 나는 나도 모르게 화가 폭발, 후배를 쳐다보며 한 마디를 싸납게 쏘아 붙였다.

 

!! 너 그럴라고 의사랑 결혼 했잖아. 이제 닥치고 일 해!!”

 

그 말을 들은 팀장과 선배들은 나의 집안 사정과 성질을 알기에 어머, 빨리 가서 일 해야지라며 부산을 떨곤 허겁지겁 자기 자리로 돌아갔고, 갑자기 공격을 당한 후배는 혼이 나간 듯 소리 없이 웃으며 찌그러진 입술로 썩소를 흐물거리곤 나를 쳐다보았다. 그리곤 머그컵을 양손으로 꼭 쥐고 내가 제자리로 돌아갈 때까지 돌이 된 것처럼 그 자리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