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물탐방(探訪) ★

용산 전쟁기념관 방문기 (2) - 만원데이트

스파이크(spike) 2007. 8. 9. 15:36

압록강에서 '수통'에 물을 뜨는 국군 병사의 감격적인 순간의 모습을 '재연'(再演)하여, '전시'(展示)

해 놓았습니다. 평양을 탈환한 국군은 계속 북진하여 청천강을 건너 초산에 입성하였습니다. 제6보병사단 장병들은 그 여세를 몰아 국경선인 압록강변까지 진격하여 1950년 10월26일 통일의 증표로 압록강 물을 수통에 담았습니다. 이때 통일이 되었어야 했는데, 이후 중공군의 '개입'(介入)
 으로 눈물을 먹음고 다시금 38˚선 뒤로 물러나야만 했습니다. 그것이 바로 '1.4후퇴' 입니다.

국군제3사단 22연대 3중대장으로 '피의능선 전투'에서 3일간의 격전끝에 고지를 탈취하였으며, '금화지구전투'에서 장열히 전사하여 소령으로 추서된 '김왕호소령'이 사용하던 유품과 무공훈장 입니다. 이런분들이 있었기에 지금의 제가 이런 '호사'(豪奢)를 누리며 살고 있는것은 아닐까요. 

한국전쟁 당시 공군비행장의 모습을 '미니어처'로 재 구성한 것 입니다. 유엔군과 미군의 도움으로 공군력에서는 북한공산군보다 우위에 있었다고 합니다.  

6.25전쟁 당시 한국군 포병부대의 105mm 곡사포 사격 모습을 재현한 것입니다. 6.25전쟁 발발 당시 북한군은 각종 야포 728문을 보유한데 반해 한국군은 105mm 곡사포 91문 밖에 보유하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나 전쟁을 치르면서 한국군 보병사단에 105mm 곡사포 3개 대대로 중편되어 막강한 화력을 지원하였습니다. 이 말을 다른말로 '유추'(類推)해 본다면 북한군이 전쟁준비를 하고 있을때 한국정부는 한자리 차지하기 위한 '당파싸움'만 일삼고, 놀고 먹었다는 결론에 이른답니다. 

'인천상륙작전'시 '팔미도'를 탈취후 '게양'(揭揚)

했던 '성조기'를 기증받은 '맥아더사령관'이 유격대장 '최규봉'에게 보낸 맥아더장군의 감사서신과 사진 입니다. 또 밑에 있는 전리품은 해병초대 사령관 '신현준'대령이 사용한 쌍안경과 상륙군 사용 장구류,상륙작전 중 최초로 생포한 북한군의 복장 입니다. 개인적으로 여지껏 필자가 보아왔던 장군들중에 가장 '카리스마'(charisma)
넘치고 진정으로 '군인' 다운 '풍채'(風采)를 지니신분은 '맥아더장군'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1.4후퇴를 하던시기 '피난민'의 모습입니다. 1950년대를 전후하여 우리나라는 농업이 주된 산업이었지만 식량이 절대 부족하던 시기였습니다. 6.25 전쟁으로 고향을 떠난 피난민들은 더욱 비참하였고, 대부분의 국민들은 우방국이 원조한 구호식량에 의존하였으며, 부족분은 나무껍질, 풀잎 등으로 연명하였다고 합니다.  일제의 '식민지시대'를 벗어난지 얼마되지 않아 먹고 살기도 힘든때에, 소위 머리에 먹물좀  묻혔다는 '지식인'들은 

국민을 위한다는 명목하에, 자신들의 욕심을 '이념전쟁'으로 표출시킨 것이며, 그 피해는 고스란히 국민들에게 고통으로 돌아왔습니다. 삶의 방향을 완전히 잃어버린듯 앉아 고개를 숙이고 있는 청년의 모습과 주변의 비참함으로 인해, 우리 부모님 세대가 격어야 했던 상황을 과거로 돌아가 보는것 같아, 상당히 가슴아프게 관람했던 '용산전쟁기념관' 3층의 6.25 전쟁실 입니다.     

피난시절의 시장풍경 모습입니다. 전쟁으로 생활이 어려워져 남녀노소 모두가 생활전선에 나섰던 시기였으며, 시장에서는 껌을 팔거나 구걸하는 어린이, 상이용사, 지게 꾼 등을 흔히 볼 수 있었다고 하네요.

6.25 전쟁으로 전시교육은 '노천'이나 '천막교실' 등에서 이루어졌습니다. 빈곤 속에서의 열정적인 전시 교육은 수많은 '인재'(人才)

를 양성하여 오늘과 같은 부강한 나라를 건설하는데 밑거름이 되었다고 합니다. 너무나 실감나게 만들어 놓은 이 전시물들로 인해 그때의 교육열과 학교생활을 자세히 느낄수 있었습니다. 

1950년 당시에 사용하였던 교과서 입니다. 교과서 중에 '농사짓기'라는 책이 눈길을 끌었습니다. 그 시절만 해도 농경업 중심이였던 국가이기에 가능했던 과목이 아니였나 생각되어지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