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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 보령 구도심의 잔상.

스파이크(spike) 2026. 1. 15. 11:07


보령 구도심엔 커다란 시장이 하나 있다.
구역이 3개인지 4개인지 모르겠지만, 각기 이름을 달리 한 시장들이 일자로 뻗은 아케이드와 함께 늘어서 있다. 이곳은 도심이 몰락하면서 슬럼화 비슷하게 변했는데 좀비 영화나 예전 깡패들이 등장하는 장소에나 나올법한 장소처럼 보인다.

일단 골목에 들어서는 순간, 시간이 멈춰 있다는 느낌이 먼저 드는데, 간판은 아직 켜질 것처럼 매달려 있고, 문은 잠겨 있지만 누군가 금방이라도 안에서 나올 것 같은 기척이 남아 있다. ‘맥주·양주’라는 단순한 글씨, 하트 모양이 붙은 노란 창문, 상호보다 전화번호가 더 크게 적힌 간판들. 이곳은 손님을 끌어들이기 위해 존재하던 공간이 아니라, 이미 서로를 알고 있던 사람들이 하루를 정리하러 오던 장소였다는 걸 단번에 말해준다.

예전 보령 한내시장 건너편에는 이런 술집들이 줄지어 있었다고 하는데 화려할 필요도 없었고, 깨끗할 이유도 없었다. 일을 마친 광부와 항만 노동자, 시장에서 하루 종일 서 있던 상인들이 씻고 나와 그대로 들러 소주, 맥주, 양주로 몸을 풀던 곳. 거친 사나이들에게 이러한 술집은 유흥이 아니라 휴식이었고, 사교가 아니라 생활의 연장이었다. 그래서 이 골목의 가게들은 낮에는 죽어 있고, 밤이 되면 자연스럽게 숨을 쉬었다.

보령은 한때 ‘일하는 도시’였다. 석탄과 금을 캐던 광산, 물자가 오가던 항만, 그리고 그 모든 흐름이 모이던 시장이 동시에 돌아가던 시절이 있었다. 현금을 손에 쥐고 하루를 끝내던 사람들이 많았고, 그 돈은 멀리 가지 않았다. 시장과 골목, 술집 사이를 오가며 도시 안에서 순환했다. 이 골목은 그 순환의 끝이자 마무리였다.

하지만 광산이 닫히고, 항만의 기능이 줄어들고, 도시의 중심이 이동하면서 사람들은 하나둘 빠져나갔다. 일자리가 사라지자 생활도 함께 빠져나갔고, 생활이 빠져나가자 술집도 이유를 잃었다. 간판은 남았지만 불을 켤 사람은 없었고, 문은 닫혔지만 철거할 이유조차 없었다. 그렇게 이곳은 망한 곳이 아니라, 그저 더 이상 필요 없어져 버린 공간이 되었다.

지금 이 골목을 걷다 보면 폐허 특유의 요란함은 없다. 무너진 건물도, 과장된 적막도 없다. 대신 오래된 타일 바닥과 빛바랜 간판, 사용되지 않는 에어컨 실외기, ‘비상구’라는 표지가 아직도 제 역할을 기다리는 듯 붙어 있다. 이 모든 게 말해준다. 이곳은 한순간에 끝난 게 아니라, 아주 천천히 늙어간 장소라고.

관광지로 재탄생하지 못한 구도심은 대개 이렇게 남는다. 새로 포장되지 않았기에 더 솔직하고, 정리되지 않았기에 더 많은 이야기를 품는다. 대천해수욕장이 웃고 있을 때, 이 골목은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채 도시의 다른 얼굴을 지켜보고 있었다. 누군가는 떠났고, 누군가는 잊었지만, 공간만은 끝까지 자리를 지켰다.

이 골목은 이제 술을 팔지 않는다. 대신 한 도시가 어떻게 먹고살았고, 어떻게 버텼으며, 어떻게 조용히 물러났는지를 보여준다. 관광 안내서에는 나오지 않지만, 보령을 이해하려면 반드시 한 번은 걸어야 할 장소다. 네가 찍어온 사진들은 폐업한 술집의 기록이 아니라, ‘일하던 도시 보령’의 마지막 잔상이다. 그리고 이런 장소는 사라지기 직전보다, 아무도 관심을 두지 않을 때 가장 진실한 얼굴을 드러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