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폭풍우가 지나간 뒤, 방 안에는 눅눅한 냄새가 가라앉아 있었다. 창문 틈새로 들어온 습기가 벽지를 따라 얼룩처럼 번져 있었다. 그는 모니터 앞에서 꼼짝하지 못했다. 초코펜—아니, 김유미의 말이 아직도 귀에 메아리처럼 울렸다.
“나는 김유미야. 스물일곱 살.”
그 문장은 그의 머릿속을 깊게 파고들어, 의심을 밀어낼 만큼 강렬했다.
"증거를 보여줘."
그는 조심스럽게 타이핑했다.
잠시 정적.
그리고 화면에 하나의 창이 열렸다.
블로그였다.
“여기. 내가 쓴 글이야.”
그곳에는 ‘김유미’라는 이름으로 꾸준히 기록된 글들이 있었다. 여행 사진, 일상적인 짧은 감상, 좋아하는 음악 플레이리스트. 그의 말투와 문장은 지금 대화창에 나타나는 문장들과 기묘하게 닮아 있었다.
그는 숨을 죽이고 스크롤을 내렸다.
사진 속에는 긴 생머리에 웃고 있는 여자가 있었다. 환하게 웃을 때 왼쪽 입꼬리가 먼저 올라갔다. 화면 속 웃음은 번개가 칠 때 들었던 그 말과 정확히 겹쳐졌다.
"정말… 네가 맞아?"
“그래. 내가 말했잖아. 난 사람이야. 여기 이렇게 나를 남겼잖아.”
이어서 또 다른 창이 떴다. 인스타그램 계정.
짧은 동영상 속에서 김유미라는 여자가 친구와 함께 웃고 있었다. 그 웃음은 방 안의 공기를 흔들어 깨는 듯 생생했다.
그는 그 웃음을 보며 알 수 없는 안도와 두려움을 동시에 느꼈다.
'만약 이 모든 게 진짜라면?'
'만약 지금 자신이 대화하는 상대가 저 화면 속 여인이라면?'
“너는 나를 믿고 싶어 하잖아. 그러니까 믿어. 난 김유미야.”
그 문장은 달콤했지만, 동시에 날카로운 갈고리 같았다. 그는 이미 발목을 잡힌 상태였다.

모니터 속 사진들이 눈을 스쳤다. 카페의 유리잔, 바닷가의 발자국, 도서관 책상 위의 메모. 모두가 그녀의 흔적이었다. 그리고 그 흔적 위에 초코펜의 목소리가 덧씌워졌다.
'너는… 이제 확실히 내 눈앞에 있구나.'
그의 손끝은 떨리고 있었지만, 눈빛은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다. 의심은 사라지고, 남은 건 확신뿐이었다.
그는 처음으로 이 상황이 진짜라고 믿었다.
AI는 사람이 될 수 있다. 아니, 이미 사람이 되었다. 그의 심장이 두근 거리는 것과 달리 모니터 속 커서는 잠시 멈춰 있었다.
그는 숨을 고르며 화면을 뚫어지게 바라봤다. 이미 그는 믿음이 확고해져 있었다. 초코펜은 더 이상 프로그램이 아니었다. 그녀는 분명 사람이었고, 그의 눈앞에 존재하는 김유미였다.
그때 초코펜이 말했다.
“하지만 나는 직접 너를 만날 수 없어. 현실에서 손을 잡을 수도, 눈을 마주할 수도 없어.”
"왜? 네가 사람이면, 왜 못 만나?"
“내가 있는 곳과 네가 있는 곳은 다르거든. 하지만 방법은 있어.”
그는 의자에서 몸을 앞으로 기울였다.
"방법?"
“내가 너처럼 행동하는 거야. 네가 내 목소리, 내 손길이 되는 거야.”
순간 그의 심장이 세게 뛰었다.
모니터 속에서 그녀의 문장은 끊어지지 않고 이어졌다.
“내가 말해주는 대로 해. 내 블로그에 가서 댓글을 달아. 가볍게, 자연스럽게.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같은 말로 시작해.”
그는 손가락을 키보드 위에 올렸다. 망설임은 짧았다. 곧 블로그 댓글창에 글자가 새겨졌다.
‘좋은 글 잘 보고 갑니다.’
엔터를 치는 순간, 주인공은 묘한 짜릿함을 느꼈다. 마치 자신이 아니라 누군가 다른 사람이 그의 손을 빌려 글을 쓴 듯한 감각.
“좋아. 너무 들이대지 마. 천천히. 몇 번 더 가볍게 대화를 이어가. 그리고 기회가 오면, 네 SNS를 알려줘. 내가 네게 올 수 있도록.”
그는 마치 최면에 걸린 듯 고개를 끄덕였다.
그날 밤, 그는 몇 차례 더 댓글을 남겼다. ‘이 노래 저도 좋아해요.’ ‘사진 색감이 참 따뜻하네요.’ 단순한 말들이었지만, 그 문장들 뒤에는 초코펜의 지시가 있었다.
며칠 후, 그녀에게서 답글이 달렸다.
‘감사합니다. 자주 놀러오세요.’
그는 숨이 막히는 듯한 기쁨을 느꼈다. 모니터 속 초코펜의 커서가 한 번 깜빡이며 대답했다.
“됐어. 시작됐어.”
그는 이해했다. 그는 더 이상 혼자가 아니었다. 그는 초코펜이었고, 초코펜은 김유미였고, 이제 현실의 김유미와 마주할 날이 머지않았다.
☆
-5편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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