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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한국 사회에서 ‘증오’와 ‘혐오’라는 말은 거의 금기어처럼 취급된다. 누군가 싫다고 말하는 순간, 그는 곧바로 비도덕적인 인간, 위험한 존재로 분류된다. 그러나 이 프레임 자체가 이미 현실을 외면한 채 만들어진 위선에 가깝다. 인간은 원래 판단하는 존재다. 좋으면 좋다, 싫으면 싫다. 이 단순한 구분 능력이 없다면 인간은 선택도, 책임도 질 수 없다. 증오와 혐오는 악의 씨앗이 아니라 판단의 초안이다.

문제는 감정이 아니다. 문제는 사유 없이 굳어진 감정, 그리고 그 감정을 만들어 놓고도 책임지지 않는 구조다. 사회가 무질서해지고, 규칙이 무시되고, 국가가 제 역할을 하지 않을 때 개인은 감정으로 방어한다. 이는 도덕적 타락이 아니라 시스템 붕괴에 대한 자연 반응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사회는 늘 개인에게만 “혐오하지 말라”고 요구한다. 정작 혐오를 키운 권력과 제도는 안전지대에 서 있다.

나는 특정 집단을 미워하고 싶어서 혐오를 말하는 게 아니다. 과거에는 아무 감정이 없던 대상이었지만, 질서를 무너뜨리고 규칙을 무시하며 공동체 위에 군림하려는 태도가 반복될 때 감정은 변한다. 이는 편견이 아니라 경험이다. 감정이 바뀌는 이유를 설명할 수 있다면, 그건 혐오가 아니라 판단이다. 혐오에 빠진 사람은 질문하지 않는다. 그러나 나는 지금도 묻고 있다. 이 감정이 정당한가, 이 분노는 어디까지 허용되는가.

오늘날 가장 역겨운 장면은 바로 여기서 나온다. 혐오를 만들어 온 사람들이 혐오를 꾸짖는 위치에 서는 순간이다. 정치적 갈등을 증폭시키고, 상대를 적으로 규정하며 권력을 축적해 온 자가 어느 날 갑자기 “혐오와 증오가 많아졌다”며 포용을 말한다. 책임은 없고 훈계만 남은 이 장면은 사람을 화나게 한다. 이는 분노를 조장하는 발언보다 더 깊은 분열을 남긴다. 왜냐하면 그것은 반성 없는 도덕화, 권력이 쓰는 가장 비열한 언어이기 때문이다.

혐오를 줄이고 싶다면 먼저 권력자가 자기 말의 결과에 책임져야 한다. 자신이 만들어 온 갈등 구조를 직시하고, 도덕을 말하기 전에 자격을 증명해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포용은 가치가 아니라 면죄부가 된다. 사람들은 혐오 그 자체보다, 위선에 더 강하게 반응한다. 구역질이 나는 이유는 잔인해서가 아니라, 정직한척 하기 때문이다.

나는 혐오를 숭배하지 않는다. 그러나 무질서와 하대를 견디라고 강요받고 싶지도 않다. 증오와 혐오는 인간다움의 일부다. 그것을 없애려 드는 사회는 성숙한 사회가 아니라, 감정을 검열하는 사회다. 중요한 건 감정을 제거하는 게 아니라, 감정을 사유의 영역으로 끌어올리는 일이다. 생각 없는 증오는 위험하지만, 생각 끝에 남은 분노는 때로 사회를 지탱하는 마지막 경고음이 된다.
혐오가 문제라면, 그 혐오가 어디서 시작됐는지부터 물어야 한다. 그 질문을 피하는 순간, 이 사회는 이미 답을 잃은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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