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솔직히 ‘에스카플로네’를 언제 하청으로 받아 작업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는다. 더 솔직히 말하면, 그때는 이 작품의 제목이 ‘에스카플로네’인지조차 몰랐다. 당시 애니 하청 회사들은 열악한 환경에서 열정페이에 가까운 노동을 하던 곳이었고, 일본 여러 회사의 작품이 동시에 들어오다 보니 작업은 늘 뒤섞여 돌아갔다. 마감이 다가오면 며칠씩 회사에서 밤을 새며 스케줄에 맞춰 그려내는 게 일상이었고, 그래서 제목도 모른 채 작화를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물론 메이저 작품을 통으로 받을 때는 제목 정도는 알기도 했지만, 내 기억엔 그리 많지 않았다. 와타루, 은하영웅전설, 트라이건, 사이버포뮬러… 그리고 이름도 모르는 수많은 캐릭터들을 그렸던 것 같다.

얼마 전 인스타그램에서 우연히 에스카플로네 소개 쇼츠를 보게 됐고, 별생각 없이 단 댓글 하나에 생각보다 많은 ‘좋아요’가 달렸다. 몇백 개 수준이지만 내겐 꽤 큰 숫자였다. 답글을 읽다 보니 주인공들의 ‘코’ 이야기가 유난히 많았다. 코가 마음에 안 들어 안 봤다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그게 오히려 신선하게 느껴졌다. 당시 회사에서 작화를 하며 코가 이상하다는 이야기를 한 기억은 없다. 매일같이 막노동을 하듯 애니를 그리고, 때로는 성인물까지 그리던 상황에서 캐릭터 코 모양이 화제가 될 만큼 여유 있는 분위기는 아니었기 때문이다.

주인공 설정 스케치가 복사본으로 손에 들어왔을 때, 이런 자료를 갖기 어려운 시절이라 소장하려 애썼다. 하지만 이사도 여러 번 다니며 대부분 잃어버렸고, 지금은 몇 장 남지 않았다. 날짜를 보니 1995년 3월. 벌써 30년이 넘었다. 그때 이 캐릭터들을 멋지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있어 지금까지 남아 있는 모양이다. 코가 이상하다는 말을 들으니 오히려 귀엽게 느껴진다. 그 시절엔 이런 일본 캐릭터를 보려면 중국대사관 앞 외국서적 거리에서 일본 보따리상에게 들여온 ‘뉴타입’ 정도나 구매를 해야 볼 수 있었다. 그래서 아마 이런 자료가 더 귀하게 느껴졌고 지금까지 남겨둔 것 같다.

그렇게 어렵게 그린 작품에 잠깐 참여해 마감에 맞춰 넘겼지만, 국내 방영 시기에도 관심이 없었고 결국 보지도 않았다. 동경하던 현장에 들어왔지만 현실은 그저 고된 노동이었고, 수많은 작업 중 하나로 지나갔다. 그래서 아직까지도 에스카플로네를 처음부터 끝까지 본 적이 없다. 내 손을 스쳐간 장면들이 여러 나라에서 방영되었겠지만, 결국 나는 백여명 중 한 명의 참여자일 뿐 지금의 내게 큰 의미로 남아 있지는 않다. 젊음과 열정을 쏟아 원하던 일을 했지만 현실과 이상의 간극은 컸고 보상은 작았다.

요즘 애니를 넷플릭스로 보면 디지털 작업이 완전히 자리 잡아 예전처럼 라인이 흐릿하거나 채색이 죽는 일이 없다. 컴퓨터의 발전은 셀에 그리던 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달라져 놀라울 정도다. 반면 국내 애니는 ‘아치와 씨팍’ 이후 딱히 기억나는 작품이 없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도 이런 추억을 떠올릴 수 있는 세상에 아직까지 잘살고 있다는 점엔 감사한다.

인스타그램 댓글 하나로 시작해 결국 주절이 갈겨쓴 개인적 회상이 됐다. 그 시절 밤을 새며 함께 그리던 동료들은 지금 다들 잘 지내고 있을까? 그들도 지금 중년의 나이가 돼 언젠가 TV나 유튜브에서 자신이 참여한 장면을 보고 이렇게 말하지 않을까?
"!!ᆢ야, 저거 내가 그린 거야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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