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자작소설(小說) ◈

'이브'를 빗다(4)-스파이크 단편소설.

스파이크(spike) 2025. 11. 5. 17:18


눈이 떠졌다.

빛이 흐릿했다.

천장이 아니라, 뿌연 하늘을 보는 듯한 기분.
손끝이 떨렸고, 공기에선 미묘한 짠맛이 났다.
그녀는 몸을 일으키려 했지만, 손목이 무겁게 내려앉았다.

방은 네 평 남짓이었다.

벽은 하얗지도 회색도 아닌,
빛이 바래버린 무균색이었다.
가구라고는 침대 하나, 세면대, 그리고 변기.

창문은 없었다.

바닥은 따뜻했지만,
온기라기보다 기계의 열 같았다.

‘여기가... 어디지?’

그녀는 머리를 움켜쥐었다.
손등 위로 바늘 자국이 있었다.
살짝 만지자 통증이 번졌다.

그때, 사방의 벽 안에서 소리가 흘러나왔다.
남자의 목소리였다.
조용하지만, 단단한 톤.

> “김선아. 스물한 살. 키 171센티미터. 몸무게 157킬로그램. 혈압 164에 102.
체지방률 54%. 비타민 D 결핍. 간 수치 비정상. 스트레스 호르몬 코르티솔 농도, 평균치의 세 배.”



그녀는 숨을 멈췄다.

자신의 몸을 훑는 듯한 목소리,
그건 인간의 대화가 아니라, 진단이었다.

> “너는 이제 회복 단계에 있다.
음식과 물은 규칙적으로 제공된다.
그러나 움직이지 않으면, 공급은 중단될 것이다.”


“누구세요...?”

그녀의 목소리가 갈라졌다.

“여기... 어디예요? 제발, 살려주세요.”

대답은 없었다.
대신 조명이 천천히 어두워졌다.
그녀는 혼자 남겨졌다.
시간이 멈춘 듯했다.

얼마나 지났을까, 문이 ‘철컥’ 하고 열렸다.
빛 한 줄기가 방 안으로 들어왔다.
그녀는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났다.
문 너머는 암흑이었다.

빛과 어둠의 경계선 위에서 목소리가 다시 들렸다.

> “나와라.”

그녀는 두려움에 몸을 떨었다.
그러나 문밖으로 나가지 않으면 아무것도 얻지 못할 것 같았다.

목이 말랐다.

배도 고팠다.

그녀는 조심스레 한 발을 내디뎠다.

심보쯤 걸었을 때,
갑자기 눈이 멀 정도의 조명이 켜졌다.
순간적으로 몸이 경직됐다.

그 앞에는
러닝머신, 웨이트 머신, 요가 매트, 사이클,
각종 운동기구가 놓인 거대한 실내 공간이 있었다. 바닥은 완벽하게 청결했고,
벽에는 빛나는 유리 스크린이 걸려 있었다.

> “오늘의 프로그램을 시작한다.”

벽의 스크린이 켜지며
여성의 실루엣이 나타났다.
그녀는 말없이 스트레칭을 시작했다.
음악도, 리듬도 없었다.
그저 명령처럼 반복되는 동작들.

> “따라 해라.”

그녀는 그대로 굳었다.

그러나 잠시 후,
벽 쪽에서 ‘철컥’ 소리가 나며 배식구가 열렸다. 안에는 투명한 물 한 컵과,
쑥과 마늘 몇 조각이 담긴 접시 하나.

그녀는 목소리를 들었다.

> “운동량을 채우지 못하면 식사는 없다.
오늘은 적응일이다. 1시간 20분간 수행하라.”


그녀는 믿기지 않았다.

“쑥과... 마늘...? 장난해요?!”

하지만 벽은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조명이 더 밝아졌고, 스크린 속 실루엣이 반복적으로 그녀를 향해 손짓했다.

그녀는 울음을 삼켰다.
몸이 무겁고, 숨이 차고, 발이 떨렸지만,
결국 그녀는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했다.

한 시간 후,
배식구가 다시 열리며
이번엔 따뜻한 물과 단백질 죽이 나왔다.
그녀는 손으로 허겁지겁 떠먹었다.

그 순간,
그녀는 비로소 깨달았다.
이곳에서의 규칙은 단 하나.

‘움직여야 산다.’

---

그날 밤,
침대에 누운 그녀는 처음으로
자신의 몸이 ‘누군가의 계획 속’에 있다는 걸 느꼈다.

모든 것이 조율되어 있었다.
조명, 식사, 수면, 그리고 침묵의 틈까지도.

그녀는 속삭였다.

“여긴 감옥이 아니야... 실험실이야.”

벽 안의 어딘가에서 미세한 기계음이 흘러나왔다.

그녀는 귀를 기울였다.
그 소리는 심장박동 같았다.
하지만 그건 자신의 것이 아니었다.
그녀 위에서, 누군가의 박동이 들려오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