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꽤 오래 걸은 느낌이 들었다.
숨이 찰 정도는 아니었는데, 이미 도착했어야 할 만큼의 시간이 지나 있었다. 경사가 거의 없는 완만한 언덕이었음에도 세월 탓일까, 아니면 평소보다 많은 보폭 수 때문일까... 어찌 됐건 발걸음은 서두르지도 늦추지도 않은 속도로 계속됐다. 뒤를 돌아보니 출발점에서 상당히 멀리 온 듯 보였고, 앞을 보자 아직 남아 있는 거리가 조금 길게 느껴졌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빨리 가야 한다는 생각만 분명했다.
대학교 교양과목 같은 수업을 들으러 가는 길이었는데, 반드시 필요한 것도 아니고, 빠지면 문제가 되는 종류도 아니며, 내 돈 내고 취미 활동처럼 다니는 것이라 조금 늦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음에도 일부러 속도를 높이진 않았다. 그냥 이유 없이 시간은 맞춰야 한다는 느낌만 있었다.
건물은 캠퍼스 강의동과 비슷했다. 새것도 낡은 것도 아닌 외벽, 특징 없는 출입문, 몇 층인지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될 높이. 그렇게. 처음 와 본 곳인데도 망설임 없이 안으로 들어갔다. 계단을 오르는 동안 발소리가 조금 크게 울렸다. 위층에서 사람들 말소리가 섞여 내려왔다. 수업 시작 전 특유의 웅성거림, 아직 집중되지 않은 목소리들이었다. 문 앞에 서자 그 소리가 더 또렷해졌다.
잠깐 멈췄다.
지각은 아닌데 이미 시작된 것 같은 타이밍이었다. 노크를 해야 할지 고민할 필요가 없는 문이었다. 그냥 열고 들어가면 되는 종류였다. 사람들이 앞을 쳐다보고 있는 반대편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섰다.
제일 먼저 보인 건 사람들의 어깨와 책상이었고, 그다음이 얼굴들이었다. 시선이 한 바퀴 돌아 마지막에서 멈췄다. 익숙하다는 감각이 먼저 왔고, 기억이 뒤늦게 따라왔다.
S였다.
내가 짝사랑하던 S.
눈이 마주쳤다.
피하지도, 더 보지도 못한 채 잠깐 그대로 멈춰 버렸다. 누가 먼저 시선을 돌렸는지는 떠오르지 않는다. 다만 그 몇 초 동안 교실 안의 다른 움직임이 전부 느리게 움직이는 것처럼 느껴졌다.

나는 빈자리를 찾는 척 안쪽으로 들어갔다. 무릎 뒤쪽으로 의자를 슬며시 밀며 앉는 때 소리가 필요 이상으로 크게 들렸다. 가방을 내려놓고 메모장을 꺼냈다. 강사가 들어오며 인사하는 목소리가 들리고 있었지만 귀에 부딪칠 뿐 음성은 기억나지 않았다. 일정한 높낮이로 이어지는 소리가 웅웅 거리는 기계음처럼 귀만 스쳤을 뿐이다.
50분 강의 내내 무슨 내용을 설명했는지 하나도 기억에 남지 않았다. 필기를 하는 척 펜도 움직였지만 글자를 적은 것이 아닌 의미 없는 선만 꼬불꼬불 새까맣게 남아 있었다. 고개를 들면 시선이 부딪칠 것 같아 들지 못했고, 들지 않으려 할수록 그쪽에 그녀가 있다는 감각만 더욱 또렷해졌다.
그는 수업을 들으며 몇 분 후, 무슨 말을 해야 할까 생각했다.
“오랜만이네”는 너무 가벼운 것 같았고,
“잘 지냈어?”는 지나치게 진부한 말 같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게 차라리 더 자연스러울 수도 있겠단 생각이 들었다. 그 짧은 수업 시간의 강사의 강의는 그저 사각형안의 작은 울림통 속의 메아리 같이 들렸을 뿐이었다.
수업이 끝날 때까지 말을 안 하는 게 맞을까? 아니면 지금이라도 한번 쳐다봐야 하나? 몇 번이나 고개를 들 뻔하다 멈췄다. 손가락 사이에선 필기도구가 방정맞을 정도로 돌려지고 있었다. 곧이어 쉬는 시간을 알리는 소리가 났고 사람들이 움직이기 시작했다. 의자가 밀리고 책장이 덮이는 소리 사이에서 누군가 다가오는 발소리가 들렸다. 멈추는 위치에서 발소리가 누구인지를 알 수 있었다.
고개를 들었을 때 S가 서 있었다.
“오랜만이에요.”
예전과 크게 다르지 않은 차분한 음성이었다. 반가움이 과하지 않았고, 그렇다고 모르는 사람에게 쓰는 말투도 아니다.
“어... 오랜만이야...”
생각보다 쉽게 말이 나왔다. 수업 중 준비했던 문장은 하나도 쓰지 못했고, 아무 준비도 하지 못한 가벼운 인사만 남았다. 그래서 더 민망했다. 잠깐 멍하니 서 있다가 나란히 복도로 나왔다. 누가 먼저 나오자고 했는지는 기억나지 않는다.
“여기 다니시나 봐요?”
“어... 그... 그렇지.”
짧은 대화였음에도 이상하게 더듬대기 시작했다. 서로의 지금을 묻기보다는, 묻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로 흘렀다. 언제부터였는지 모르게 대학시절 쪽으로 말이 이어졌다.
나는 한동안 머릿속에서만 저장해 두었던 기억이란 상황을 꺼내 말을 이었다. 예전에 전화를 몇 번 했었다고. 세 번 정도였던 것 같다고.
말을 하면서도 목이 조금 말랐다. 굳이 꺼낼 필요 없던 얘기라는 생각과 후회가 뒤늦게 느껴졌다. S는 바로 대답하지 않았다. 잠깐 생각하는 표정을 띠었고, 기억해 내는 눈빛이 따라왔다.
“그땐 좀 바빴어요.”
짧게 말하고 시선을 잠깐 옆으로 돌렸다. 더 설명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이해해서라기보다 그만두던 순간이 떠올라서였다.
다시 수업 시작을 알리는 소리가 들렸고 우리는 교실로 돌아왔다. 자리에 앉았지만 전보다 시간이 훨씬 더디게 지나가듯 느껴졌다. 다만 길게 늘어지는 순간만이 끝나가고 있다는 감각만은 분명했다.
종이 울리며 수업은 끝났다.
사람들이 하나둘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도 가방을 챙기며 일부러 천천히 움직였다. 먼저 나가도 어색하고, 남아 있어도 어색할 것 같았다. 그때 S가 한 번 이쪽을 봤다.
특별한 의미를 찾을 정도는 아니었지만, 나가면서 함께 걷게 될 거라는 걸 알 수 있는 정도의 시선이었다.
나는 그걸 알아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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